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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정부·군부 첩보, 고부서 ‘동학혁명 시작’ 보고

동학농민혁명 시작에 관한 1894년 당시 국내외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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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길 문학박사 언제부터인가 고부봉기와 동학농민혁명을 구분하고 분리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3월 봉기라는 설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때의 3월 봉기는 백산대회였다. 그런데 1985년 이후부터 고부봉기는 ‘조선후기 숱하게 일어난 민란의 최고 단계’ 또는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이나 전사(前史)’으로 정리되고, 무장기포가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주장이 다수설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에 공포된 ‘동학농민혁명 특별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 이에 따라 고부봉기는 동학농민혁명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국가가 90년 만에 애국애족운동으로 인정한 동학농민혁명에 고부봉기는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2015년부터 사용되는 검인정한국사교과서 다수가 무장기포를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서술하였다. 이처럼 무장기포가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확정되는 것과 달리 한편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은 고부봉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연구가 지속적으로 발표되었다. 이들 연구는 공통적으로 「사발통문거사계획」부터 고부봉기와 무장기포, 그리고 백산대회 등 초기 전개 과정이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사발통문 거사계획’과 고부봉기를 주도한 전봉준 등 지도부가 이후 무장기포와 백산대회는 물론 항일의병 전쟁까지 참여한 점을 들어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으로 논증하였다.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거나 평가할 때, 사건이 일어난 그 당시의 인식이 어땠는가는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 중의 하나이다. 사건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나 체험자에게서 직접 전해 들은 제3자의 기록 등 그 당시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들의 인식과 평가가 가장 일차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사건을 전하거나 기록하면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이 아니라면, 역사적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신뢰할만한 가치를 가진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그 당시 정부 관료는 물론 유림(儒林)을 비롯한 식자(識者)층의 기득권 세력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및 일반 백성, 그리고 일본 정부는 물론 군부(軍部)와 첩보원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비롯한 각종 문서와 신문보도는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 당시 조선 조정은 “고부의 민요(民擾)가 바로 이른바 동학당 소란의 시작이다.”[고종실록 31권, 1984년 2월 15일 古阜民擾卽所謂東學黨騷亂之始也.]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더 나아가 부사과(副司果) 이설(李偰)은 1894년 5월에 쓴 「남도의 소요를 논하고 느낀 점을 서술한 상소․論南擾陳所懷疏」에서 “이 난을 최초로 조성한 자는 [전운사(轉運使)] 조필영(趙弼永)입니다. … 그리고 [균전사(均田使)] 김창석(金昌錫) 또한 난을 조성한 자 중의 하나입니다. 난은 고부(古阜)에서 처음 일어났습니다. 고부에서 난이 발생하도록 조장한 것은 전 군수(前 郡守) 조병갑(趙秉甲)입니다. … 그 난을 재촉한 자는 이용태(李容泰)가 아니겠습니까? 전 감사(前 監司) 김문현(金文鉉)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탐욕을 부려서 난을 조성한 뒤에 또 그들을 위무(慰撫)하지 않아 난을 야기하고, 마지막에는 그들을 자극하여 난을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난의 토대를 만들었습니다.”라고 하여 고부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원인을 제공한 자들로 전운사 조필영, 균전사 김창석, 고부 군수 조병갑, 안핵사 이용태, 전라 감사 김문현 등을 지목하였다. 이것은 고부봉기가 단순히 고부만의 문제로 일어난 봉기가 아니라 전라도 나아가 전국적인 문제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뒷날 동학농민혁명을 불어 온 5적(五賊)으로 불리었다. 공주의 유학자(儒學者) 이철영(李喆榮) 역시 동학농민군을 반적(叛賊)이라고 칭하면서도 조필영과 조병갑을 ‘이조(二趙)’라 하면서, 이들의 학정으로 인하여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이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다. 지금처럼 동학농민혁명을 1차와 2차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민란으로 본 것이다. 대한제국기 우국지사(憂國之士) 황현(黃玹)은 ‘오하기문(梧下紀聞)’에서 “지금 생각해 보면, 삼남지방에 민란이 일어나고 동학이 반란을 일으켜서 청국과 일본이 연이어 군대를 몰고 와서 천하가 동요되고, 종묘사직이 뒤흔들릴 만큼 긴박한 상황이 조성된 것은 모두 저 몹쓸 조병갑 한 놈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고 하며, 동학농민혁명의 원인과 발단, 그 시작을 조병갑의 수탈과 착취로 보았다. 더 나아가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상륙함으로써 국가의 존망이 위기에 처한 상황을 불러들인 근본원인으로 조병갑을 지목하였다. 좀 확대해석한 부분이 없지 않으나 1894년 당시 정서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94년 당시 고부에 살았던 유생(儒生) 류양천(柳陽川)의 일기체 기록인 『동학추고(東學推考)』 역시 “고부에서 봉기를 주도한 세력이 기호지역의 세력과 연합하여 서울로 직행하려 하였다.(合畿湖而直向京城)”고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세울 당시부터 일회성의 우발적인 거사가 아니라 전국적인 차원으로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학교도로 혁명에 직접 참여한 오지영(吳知泳) 역시 동학사(東學史)에서 1월의 고부봉기와 3월의 백산대회를 하나의 연속된 사건으로 기술하였다. 계속

지역경제 침체속 멀쩡한 보도블럭 갈아엎어

상동 상가는 개점휴업 ‘설상가상’ 3억 원 투입 공사…극소수 지역업체만 배불려 작년 아스콘포장 추경 75억 혈세낭비 고질적

[크기변환]상동보도블럭공사전.jpg

정읍시 상동 인도정비공사 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병(코로나19) 사태로 지역 소상공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 정읍시가 인도정비 공사에 들어가자 영업 방해에 따른 설상가상의 피해에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특히 이번 인도정비의 모든 공사 구간에 멀쩡한 상태의 보도블럭을 갈아엎어 혈세 낭비에 특정업체만 배불리는 꼴이란 지적이다. 정읍시에 따르면 충정로 현대2차A~현대3차A와 상동회관~내장꽃화원의 인도 보도블럭 교체 공사를 이달 말 완공 목표로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은 관내에서 상가가 가장 밀집된 곳으로 양쪽 인도 공사를 위해 모두 파헤쳐 약 한 달 넘게 공사중이어서 유동인구가 급감한 실정이다. 해당 공사는 총 3억 여 원을 투입해 두 곳으로 나눠 발주, 각각 다른 업체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두 곳의 시공사는 전주업체로 알려졌고, 하도급으로 지역업체가 맡아 공사하고 있는 점에 시민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3억 원의 사업비에는 약 절반가량이 관급 자재비가 포함돼 있다. 고급 투수블럭 포장을 위해 지역 특정 업체가 납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도급과 자재 납품을 맡은 소수의 지역업체가 시정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도 모호하다. 정읍시 상동 인도정비공사 여기에 이번 인도공사는 시공된지 수년만에 다시 파헤쳐진 것이란 점에서 불요불급의 예산이 아닌 업체 밀어주기를 위한 공사 강행이란 인상이 짙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민선7기 들어 토목공사나 도로포장 등 예산을 절감해야 하는 분야에 쓸데없이 사업이 급증한 경향이 있다”면서 “이런 토목공사나 도로포장은 측근들만 배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일침했다. 시민들의 이런 반응은 정읍시가 토목공사에 열을 올리고 있는 점과 무관치 않다. 부실시공으로 논란이 됐던 아스콘 덧씌우기를 위해 2018년 총 45억 원의 예산을 집행한 것도 모자라, 2019년에는 추경에서 30억 원을 늘려 75억 원이나 쏟아부어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런 지탄에도 비슷한 공사가 잇따르고 있는 것은 집행부 견제의 힘에 한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끊이지 않고 있다. /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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